2021. 6. 2. 17:00ㆍ투비랜드 생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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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비랜드의 정보 이야기, 이백 이십 여덞 번째 시작합니다
권오설 선생
권오설 선생은 3.1운동 참가 이후 고향인 안동에서
학습강습소를 조직하여교육운동에 힘을 쏟았으며,
농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선생은 6.10만세운동의
모든 계획과 추진을 주도했고,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직접 작성했습니다.
6.10만세운동 관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출옥을 며칠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습니다.
이선호 선생
이선호 선생은 1925년 9월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를
창립할 때 사업부 책임자로, 1925년 11월에는
임시집행부 등에 선임됐습니다. 6.10만세운동 당시
선생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0여 명이 만세를 외쳤고,
격문서 약 1천여 장과 태극기 30여 매를 배포했습니다.
선생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27년 9월 20일 일본으로 건너가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에 종사하며 일본 경찰에
붙잡히는 일을 거듭하다 1933년 귀국했습니다.
박래원 선생
박래원 선생은 1920년 천도교 청년회에서 천도교
청년동맹이 분리될 때 창립주역으로 활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권오설 선생과 깊은 동지적 관계를
이루었으며, 조선공산당과 천도교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선생의 도움으로 천도교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선생과
천도교 관계자들은 격문의 지방배포와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동환 선생
이동환 선생은 박용규 선생 등 5명과 함께 통동계
소속으로, 이들은 6.10만세운동의 처음부터 거사까지
뜻을 같이한 동지였습니다. 선생은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기관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충정로 일대의
폭파와 같은, 보다 강력한 투쟁방법을 제시했습니다.
이동환 선생은 6월 10일 오후 2시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박용규 선생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6월 19일, 6.10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경성복심법원의 공소심에서 1927년 4월 1일
징역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건국훈장 추서
정부는 네 명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오설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
이선호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박래원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
이동환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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