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독립운동가] 중국에서 독립전쟁을 치르며 항일 자취를 남긴 광복군 지휘관 - 채원개 선생

2020. 9. 2. 17:00투비랜드 생활정보

 

[2020년 9월 독립운동가] 중국에서  독립전쟁을  치르며 항일 자취를 남긴 광복군 지휘관 - 채원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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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개

 

1895년 3월 24일 평안1남도 영원에서 출생한

채원개선생는 개신교 계열의 의명소학교를 졸업하고,

21세에 조선보병대에 입대해 군인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으나 탈옥하다

 

고향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됐으나

탈옥해 북만주로 이동하는 중에 대한독립단

총단장인 조맹선을 만나 대한독립단

군사교관이 됐습니다.

 

 

일본군과 전투에 관통상을 당하다

 

1920년 일본이 독립군 세력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자

선생은 대한독립단 통임관구 지대장으로

열세인 병력과 물자로 일본군과 격돌해

관통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공부하면서 경험을 쌓다

 

채원개 선생는 1921년부터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으며,

1923년에 낙양군관학교 기병과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학을 배웠고, 중국 내전에서 실전 경험도

쌓았습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을 가르치다

 

1927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맡은 채원개 선생은

제대로 된 군사양성 기관이 없이 무장투쟁하던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가르쳤습니다.

 

 

임시정부를 여러방면으로 도와주다

 

선생은 중국 광저우 동산백원을 임시정부의 임시청사로

제공하고, 아세아여관을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의

숙소로 활용하는 데 기여하는 등 임시정부를

측면에서 지원했습니다.

 

 

광복군에 합류하다

 

1940년 광복군에 합류해 참모처장, 1943년 총무처장

등을 역임하며 후방에서 지원 활동을 펼쳤으며,

1944년 광복군 제1지대장을 맡는 등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지휘했습니다.

 

 

광복 후에 개인신분으로 귀국하다

 

채원개 선생은 광복 후 미 군정이 광복군의 입국을

거절하고 개인 자격으로 입국만을 허락했기 때문에

부대를 해체하고 부하들을 먼저 귀국시킨 뒤

이듬해 1946년에 귀국했습니다.

 

 

채원개 선생 건국훈장 받다

 

이후 제3여단장, 제2사단장을 역임, 1949년 준장으로

예편했으며 1974년 2월 16일 별세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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