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일 의병의날 기념] 안중근 의사의 생애 알아보기

2020. 6. 1. 17:00투비랜드 생활정보

 

[6월1일 의병의날 기념] 안중근 의사의 생애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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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비랜드의 정보 이야기, 백 십 네 번째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6월1일 의병의 날을 기념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 중 한분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모든 분들이 잘 알고계신 성함이죠?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과 사후에 관련된 큰 사건들 위주로 정리해드릴게요!

 

 

안중근(1879.9.2~1910.3.26)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순국

 

안중근 의사는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을 응칠이라고 지었으며

어릴때부터 말타기와 사냥에 능했으며 포수들 사이에서도 명사수로 알려지고 있다.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을 접하고

가톡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도마(Thomas)라는 세레명을 얻었다.

 

 

동의단지회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했다.

그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동지 우덕순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선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안중근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의병참모중장으로 자신의 활동지역에 겁 없이 쳐들어오 적장 이토를 온전하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키는데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사장인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이후 의사 일행은 유동하, 조도선등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키고 열차가 정차하는

채가구(現지야이지스고역)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에서는 자신이 직접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러나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들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오전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30분경 코코프초프의 안도로 역 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의사는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민주철도 이사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안중근 의사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리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출저 : 네이버 지식백과 [안중근]

 

 

순국

 

의사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출저 : 네이버 지식백과 [안중근]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신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입니다.

그러한 조마리아 여사가 자신의 아들인 안중근 의사의 사형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마음보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으로 쓴 편지가 있는데요.

다같이 읽어보았으면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신 조마리아 여사 역시 독립운동가로써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신 분입니다.

 

 

안중근 어머니(조마리아)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고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공적으로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중

후손이 확인되지 않아 훈장을 전수하지 못한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고 있습니다.


의병의 날을 맞아 안중근 의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어떠셨나요?

알고있던 사실도 있고 몰랐던 사실도 있는데 이러한 얘기들을 알게되면 저도 모르게 숙연한 마음이 드네요^^

이번 의병의 날에는 안중근 의사 말고도 힘든 시절에 나라를 애써주신

여러 독립 운동가들한테 한번 더 감사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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